엑박 구입 후 지금까지 써먹은 것 만으로도 구입에 후회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엑박 사길 정말 잘했다' 는 마음까지 드는 게임을 만났습니다. 바로 얼마 전 유럽과 북미에서
출시된 'Fahrenheit' 가 바로 그 게임입니다. (이하 파렌하이트. 북미판 제목은 Indigo Prophecy)
나름대로 정통 어드벤쳐 게임을 좋아하는 터라 엑박용 CSI나 Still Life 등을 거쳐오긴 했지만, CSI는 이름값으로 한목 잡아보자는 어설픈 수작을 부린 게임이었고 Still Life는 흥미는 있었지만 너무나도 뻔하고도 귀찮은 시스템에 목이 매여 있는 느낌이라 금방 손을 놓게 되더군요. 정통 어드벤쳐가 활기를 잃어가는 것도 다분 이해가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렌하이트는 근래 보기 드문, 꽤 자극적인 정통 어드벤쳐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니크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각종 시스템과 미려한 연출은, 흔히들 고루하다 일컫는 어드벤쳐의 정석적인 전개를 '그것이 당연하다' 는 듯 받쳐주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나머지, 감탄하게 되더군요.
이야기는 한 겨울밤 뉴욕시의 작은 음식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시점과 형사들의 시점으로 풀어가는 이야기가 스토리텔링 식으로 엮어져 가게 되지요.
- New Movie
지금까지 영화적 연출을 의도하고 만든 게임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파렌하이트는 아예 대놓고 '영화' 를 만들었습니다. 게임 시작을 New Game이 아닌 New Movie라고 당당히 써 놓은 것도 모잘라서, 튜터리얼 모드는 마치 DVD영화의 서플먼트같은 느낌으로 진행되게 됩니다. 3D로 모델링된 게임 감독이 자동차 충격테스트용 인형 같은 모델을 통해서 직접 조작법을 설명해 주지요.
이 튜터리얼로부터 알게 되는 게임의 전반적인 조작법은, 지금까지의 어드벤쳐 게임의 범주를 크게 넘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른쪽 스틱을 통한 인터랙티브
파렌하이트에서 가장 특이하다고 부를 수 있는 조작법이 이 오른쪽 스틱 결정입니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사물 앞에 서면 화면 위에 그 사물로 할 수 있는 동작을 표시하는 아이콘이 표시되고, 오른쪽 스틱을 특정 방향으로 조작하라는 표시가 나오게 됩니다. 플레이어는 그 조작 표시에 맞춰 오른쪽 스틱을 살짝 밀어주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선 돌려주는 것으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문을 밀 때는 그 문의 방향으로, 특정 위치를 조사하기 위해 앉을 때는 아래로 등으로 말이지요.
결국에는 여타 어드벤쳐 게임의 결정 버튼을 누르는 것과 큰 차이는 없지만, 상호작용 가능한 여러 사물이 밀집되어 있는 경우에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적당한 위치로만 가면 화면 위쪽에 그 근방에서 조작할 수 있는 사물들이 전부 표시되어 알아보기 편하지요. 3D 어드벤쳐 게임에서 종종 있는 - 결정 버튼을 누를 위치가 애매해서 헤메게 되는 - 문제를 원활히 해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컨셉은 '직접 손을 움직이는 감각'.

문을 열고 도망갈 것이냐, 태연하게 돌아보며 말을 걸 것이냐!
대화시의 선택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선택지의 짤막한 설명과 함께 선택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방향이 표시되지요. 또한 대화시에는 선택지를 선택하는 데 제한 시간이 있어서, 시간 안에 선택하지 못하면 대화가 끊어지고 맙니다.

주제문과 방향, 그리고 제한시간이 표시된다.
- 힘을 쓸 때는 L, R 트리거 교환 연타
실제로 게임 중에 나오는 장면을 예로 들어서, 바닥의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한다고 쳐 봅시다. 물에 뛰어들어서 소년이 있는 위치까지 헤엄쳐 가려면 L, R 트리거 버튼을 교환해서 빠르게 연타해야 합니다.
L R L R L R L R L R L R L R L R ...식으로 말이지요.
소년을 잡고 물 위로 올라오는 것도, 표면에 나와서 소년을 올려놓는 것도, 자기 자신이 물 위로 올라오는 것도 전부 이러한 교환 연타로 이루어 집니다. 엑박 L, R 트리거가 좀 빡빡하다 보니, 이것도 의외로 힘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책장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칼라(Carla)가 폐소공포증인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이다.
- 급박한 상황에서의, L, R 스틱 커맨드 입력
튜터리얼에서, 들이닥쳐 오는 차를 피하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만회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이 조작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화면에 'Get Ready' 라고 먼저 표시되어 준비 시간을 주고, 화면에는 L, R 스틱을 의미하는 희미한 표시가 보이게 됩니다. 이 스틱 표시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빠르게 입력해야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악의 전개 내지는 게임 오버로 이어지게 되지요.
또한 이러한 상황 이외에도 커맨드 입력은 사용됩니다. 형사의 경우 추리를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해 두뇌회전을 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범인의 경우 자신의 능력인 미래시(未來視)를 성공시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게임 중에는 이 커맨드 입력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타 연주' 도 준비되어 있더군요.

펀치 킥 레볼루션.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어드벤쳐 게임에 있어서 이런 요소는 꽤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여담이지만, 다이나마이트 형사의 특정 장면을 떠올리게도 하더군요. (...)
- 플레이어의 기분 상태에는 언제나 주의할것
반 농담으로 말하자면, 게임 중의 주인공들은 귀도 얇고 감정 변화도 격합니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하면 상태 게이지가 내려가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동료가 돈 갚으라고 꽥꽥대면 -5, 애인과 말싸움을 하게 되면 -10, 자신이 정신이 든 장소 바로 앞에 칼로 찔린 시체가 놓여있다거나 하면 -40 등으로 말이지요.
반대로 좋은 일을 겪으면 올라갑니다. 수사가 잘 풀리면 올라가고, 힘들 때 커피 한잔 하면 올라가고, 범인의 경우 증거가 될만한 흔적들을 잘 없애 놓으면 안도감에 또 올라가게 되지요. 플레이어들의 일희일비가 잘 드러나는 장면들입니다.
아직 이 상태 게이지가 게임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겪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혹은 지금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묘한 게임 진행 변화라던지 해서 말이지요. 튜터리얼에서 밝히기로는, 특정 상황에서 이 게이지가 바닥을 치게 되면 주인공이 미쳐버리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돌아가신 부모님 사진을 보면 울적해진다. 수치가 좀 야박하지만.
- 플레이어 전환
동행이 있는 경우 B 버튼으로 플레이어 간의 전환이 가능합니다. 이때 한 쪽의 플레이어로는 느낄 수 없거나 찾을 수 없었던 단서를, 다른 플레이어라면 발견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을 찾아낼 수 있는가 없는가, 똑같은 문서를 보고도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등으로 말이지요. 게임을 풀어가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 측면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형사측은 2인1조 플레이가 기본.
- 긴박한 상황의 대처
마지막으로, 게임 중에는 시간 제한이 주어지는 긴박한 상황이 등장합니다. 위의 L, R 스틱 커맨드 입력만큼 급박하지는 않지만, 시간 안에 모든 일을 처리해 놓고 사태를 맞이해야 게임이 제대로 진행되는 경우지요. 간단한 예로, 게임 중의 한 장면을 스토리 식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단 어디까지나 감정이입을 한 예문이라 실제 게임플레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 다음날 아침. 바로 어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고도 최대한 평상을 지키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현관 문을 두드린다.
"경찰입니다, 루카스 씨. 잠깐 조사해야 할 것이 있으니 문 좀 열어 주시죠."
큰일이다. 혹시 어제 일이 벌써 다 밝혀진 건가. 진정하고 일단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행동하자.
침실의 벽장에서 옷을 꺼내 입으려고 보니 어제 양 손목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 눈에 띈다.
어서 욕실에 가서 치료해야...
욕실에서 팔을 씻고 붕대를 감자, 기분이 조금은 편해 졌다.
그래, 소변을 봐 두면 조금은 편안해 질지도.
...기분이 별로 나아지진 않았다.
"루카스 씨! 나오지 않으면 강제로 들어가겠습니다!"
욕실에서 너무 시간이 걸렸다, 얼른 침실로 가서 옷을 입고, 현관문 앞으로 와서 심호흡을 한번 한다.
문을 열기 위해 노브를 돌리자, 철컹철컹 하면서 열리질 않는다. 맞다, 열쇠로 잠궈뒀었지. 분명 열쇠는 거실 테이블 위에 있었다.
"루카스 씨, 마지막 경고입니다! 나오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열쇠를 잊어버려서...금방 찾을께요!"
열쇠를 가지러 테이블로 향하는 도중, 기둥 근처에 던져져 있는 옷가지를 보자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내가 입고 있었던 셔츠가 피투성이인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허둥지둥 셔츠를 주워 욕실로 가져간다. 밖에서는 경찰이 인내심의 한계를 보여가는지, 줄창 문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젠장, 불안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쳐들어와서 세탁기를 검사하면 어쩌지?
침대 위에는 시트로 덮어놓긴 했지만, 걷어 보면 내 손목에서 흐른 핏자국이 그대로 보일테고...젠장.
피 묻은 셔츠를 세탁기에 넣고, 테이블에서 열쇠를 가지고 다시 현관문 앞으로 돌아온다.
문을 열기 전에 보안 렌즈를 통해 바깥을 살짝 내다보자, 경찰관 한 명이 짜증난 얼굴로 서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성급하진 않은 모양이다. 나는 열쇠를 가져와 문을 살짝 열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한다.
"무슨 일이시죠?"
"옆 주민으로부터, 이곳에서 괴성이 들렸다는 항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아, 그건 제가 그런 거에요. 유리를 깨서, 손을 다쳐서요."
"그런가요. 잠깐 안을 수색해 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해 봤지만, 여기서 거부해 봤자 밀고 들어올 것이 틀림 없다. 게다가 더욱 수상하게 여겨져서 침대며 세탁기며 전부 뒤져볼지도 모른다...결국 거부해 봤자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럼요, 좋으실 대로."
빨라져 가는 고동을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한다. 경찰관은 그래도 내가 시간을 끈 것이 못마땅했는지, 잔뜩 의심스런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거 손목은 또 왜 그렇게 다치셨습니까?"
"방금 말한 것 처럼...좀 바보짓을 해서 다쳤어요."
경찰관은 열려 있는 욕실 안을 슬쩍 들여다 보고는, 뭔가 시원찮은 표정으로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내 침실이었다.

의혹(게이지)이 사그러들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괜찮아, 지금 나는 꿀릴 것 따위 없어. 섣불리 행동하지 말자.
침실 문을 열고 문 밖에 서서 안을 훑어보는 경찰관. 여기서 저 시트가 벗겨졌다가는 큰일이다.
저 경찰관의 표정으로 봐서, 뭔가 하나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 틀림없어.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찰관은 의외로 간단하게 돌아섰다.
방금 전과는 마치 다른 사람인 양, 표정도 상당히 풀어져 있었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군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루카스 씨."
"뭐...당연한 의무죠, 시민의."
경찰관이 현관 문을 나선 후, 나는 바로 문을 닫고 등을 기대었다.
큰 한숨과 함께 지금까지의 긴장이 한번에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문을 열기까지의 대처, 그리고 문을 열은 후 주고받는 말에 따라 의혹을 받는 정도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한 증거물이 가시적인 형태로 남아 있거나, 시간 안에 문을 열지 않았을 경우 의혹 게이지가 최대치가 되어 그대로 게임오버로 넘어가고 말지요.
- 세세한 단점들
세세하지만 진행상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일단은 움직임. 카메라 앵글이 바뀌고 나서도 스틱 조작 방향은 바뀌지 않아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걸어가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자주 발생하더군요. 이럴 때는 스틱을 한번 중립으로 놓은 후 움직이면 잘 움직이게 됩니다. 요즘 3D 게임들은 이런 문제가 거의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최근의 게임에서도 발견되는군요.
그리고 자막을 켜 놨을 시에 싱크가 맞지 않아서 읽기가 힘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건 다개국어 지원(음성/자막 모두 영어, 독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지원)시의 문제인가 싶기도 합니다만...자막에 의존해서 겨우 내용 파악할 정도의 실력이라, 종종 치명적일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정통 어드벤쳐 게임이 뜸해서 그런지, 가끔이라도 이런 작품이 나와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딸리는 영어 실력이나마 한동안 재미있게 플레이 할 수 있겠군요. 이런 게 한글화 되서 나와 줘야 좋을텐데 말이지요...그렇게 생각하니 좀 아쉽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품시장에 좀 기여를 하란 말이다;)
정통 어드벤쳐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플레이 해보실 것을 권합니다.

오컬트 70% 함유.
Leave your greetings here.
경찰 수사 피하는 부분을 읽으니 굉장히 흥미가 생기는군요;
하지만; 어드밴쳐 정도나 되는 것은 역시;; 한글이 아니면 요즘은 하기 힘들어서;;;
아예 읽을 줄 모르던 시절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했었는지;; 이해가 안갈 정도로;; 쿨럭 쿨럭;;
그래도 아직 정통 어드밴쳐가 나온다는게 신기하고 반갑습니다;[먼산]
속된 말로, 강추입니다. 강추.
그리고 위에는 거창한듯 써놨어도, 사실 자막 보면서 하면 중고등학교 수준 영어 정도로 그럭저럭 커버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말았다가 합니다.; (전 역시 단어가 좀 딸리더군요.; 공부 안한 증거;)
음...언어가 가장 걸리겠다.....싶은데 중학영어는 대략 알아들어도 고등영어는 못알아들음 -_-;)
정말 이런게임 한글화해주면 이뻐서 엑박 2개씩 사줄껀데;;;
감으로 때려맞추면서 하는 것도 나쁘진 않더군요.;
요즘 엑박이 효자노릇 하고 있습니다.;
'화렌하이트' 이번에 '화씨'로 아타리에서 PS2로 정발되어 나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 PS2판도 최근에 발매되는 모양이구요.
그나저나 무척 재미있어 보이네요. 오랜만의 어드벤쳐게임이라, 더 반갑기도... 꼭 플레이해보겠습니다.
아아, PS2판도 나오는군요. 저번에 엑박 없는 친구가 와서 보고는 좀 아쉬워하는 눈치던데, 그 친구한테 좋은 소식이 되겠습니다.
일판...아예 성우도 일판으로 넣어서 나오면 좋겠습니다; (아타리에 기대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PS2판이라니, 엑박 구입 계획은 또 미뤄지는. (...)
사양이 버텨줄지가 조금 걱정...퀄리티 대폭 다운 같은건 원치 않는데 말이지. 그렇다고 cut-in 장면에서 10프레임대로 떨어지는 것도 보고 싶진 않고.;